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이클 잭슨/경력 (문단 편집) == 1986년~1990년: [[Bad]] == 마이클 잭슨을 이상하게 여기는 시각은 1986년 시작되어 그를 음악적 이미지에서 밀어내고 가십의 연예인 이미지를 부여했다. 당장 어느 매체를 보더라도 [[Thriller]] 시기까지는 음악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Bad]] 앨범의 시작인 80년대 후반부터는 가십과 음악의 내용이 뒤섞여 존재한다. 1987년 [[타임지]]는 마이클 잭슨의 가십 이미지가 음악을 가려버렸다고 썼다. 또 1986년부터 '''[[백반증]]의 악화로 피부색이 하얘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1987년 발매된 [[Bad]] 앨범 커버에서 잭슨은 마치 [[백인]]처럼 달라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국제적인 논쟁거리'''가 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연예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반발에 직면해 있으며, 많은 공격의 대부분은 갑작스러운 그의 탁월한 성공을 불쾌하게 여긴 백인 록 음악 비평가들에게서 나왔는데 마이클은 백인 록 음악 평론가들의 우상 모델에 적합하지 않았다. 기타연주와 문학적인 비평 대상이 될 수 있는 노래를 작곡하고 춤출 수 있는 백인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선호한다. 그러나 마이클은 흑인의 전통적인 문화를 대표한다. 이런 전통은 백인 록 음악 비평가들이 알 수 있을 리 없고 이미 세상을 뜬 구세대 사람들에게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 >― SPIN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가십적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는가? '''잭슨에 대한 [[루머]]의 확산은 1984년 시작'''된다. 잭슨이 1984년 '''[[펩시]] 광고를 찍는 도중 [[화상]]을 입고[* 이때의 화상을 기점으로 잭슨의 [[백반증]]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어렸을 시절의 사진을 보면, 백반증은 과거부터 진행 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상 치료 센터에서 치료를 받을 무렵, 그는 산소로 가득 차 있는 챔버를 보게 된다. 잭슨과 동행한 [[의사]]는 아직은 이론적인 이야기지만 훗날 기술이 발전되어서 챔버 안에서 자면 노화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게 된다. 그 말에 호기심을 가진 잭슨은 챔버 안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기념사진 한 장을 찍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0-05804D7B000005DC-315_634x376.jpg|width=100%]]}}} || 하지만 이 사진이 [[황색언론]]으로 유출되면서 마이클은 늙고 싶지 않아서 매일 산소방에서 잔다는 루머가 떠돌기 시작한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마이클이 [[엘리펀트 맨|죽은 사람]]의 시체를 샀다는[* 정확하게는 엘리펀트 맨의 뼈이다. 엘리펀트 맨은 심한 기형에 의해 서커스 구경거리가 되어 버린 19세기의 영국인이다. '''물론 잭슨이 이것을 샀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루머]]이다.'''] 근거없는 소문까지 돌게 된다. 심지어는 평소 동물에 관심이 많던 마이클이 [[애완동물]]로 키우기 위해 [[침팬지]][* 잭슨이 데려오기 전까지는 약물 실험용 침팬지였으며, 이름은 "버블스"이다.]를 구매한 것도 논란이 되고 말았다. 결국 1986년 마이클에게는 Wacko Jacko(와코 재코,괴짜 잭슨)라는 [[별명]]이 탄생했고, 이 시기 타블로이드지 '피플'은 팝계 간단퀴즈라며 '마이클 잭슨은 이상한 건가? 아닌 건가?'라는 [[http://www.michaeljacksonrepublic.com/mj-unlike-anyone-even-himself-people-1987/|특집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다.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내 아들 마이클 잭슨"을 집필했었는데 당시 아들 이름이 가십에만 올라와 있어 속상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 잭슨 파이브 시절, 마이클이 성전환을 받고 결혼할 거라는 황당한 보도가 있고 나서 마이클의 소녀팬이 그 기사를 보고 마이클에게 울음을 터뜨렸다는 일화도 있었는데 [[Thriller]] 앨범의 대성공과 Victory Tour의 표 판매[* 마이클의 동의도 없이 형제들이 추첨식 표판매를 하려고 했으며 이것 때문에 마이클은 당시 온갖 욕은 다 먹었다. 그리고 이후 정상적인 표 판매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타블로이드의 거짓 보도[* 특히 [[미성|특유의 목소리]], 성형, 섹스할 것 같지 않은 [[무성애]] 이미지에 집중하며]가 심해지자 1984년 9월 공개적으로 마이클 잭슨 측은 루머에 반박 성명을 낸 적도 있었다. '''항상 심했던 가십이 1986년을 기점으로 그 성격과 양상에서 강해졌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마이클 잭슨은 1982년 발매한 [[Thriller]] 이후 몇 년간 솔로 정규앨범의 발매는 물론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 이외에는 별다른 음악 활동도 없었기에, 에픽 레코드는 물론 팬들도 잭슨의 새 앨범의 발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Thriller]]가 나온 지 약 5년만에 발매된 [[Bad]]는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의 마지막 협업 작품이었으며 사회적 주제의 확장을 이루어냈다. 미디어 편향, 편집증, 인종적 측면, 로맨스, 자기 계발, 그리고 세계 평화가 이에 해당한다. 마이클 잭슨은 Thriller의 음악적, 상업적 성공을 바탕으로 하여 Bad 앨범의 목표 판매량을 1억 장으로 측정했고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 이후 본격적인 앨범 제작을 시작하였다. 잭슨은 혁신적인 사운드를 찾고자 했으며, 새로운 음악 기술에 큰 관심을 보였다. 총 60곡의 노래를 썼고, 30곡을 녹음하여 그중 11곡을 앨범의 수록곡으로 정했다. "[[Man in the Mirror]]", "Just Good Friends"를 제외한 모든 곡은 잭슨이 작곡했다. "역사상 가장 기대되는 앨범"으로 묘사된 [[Bad]]는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빌보드 차트를 포함하여 '''25개 국가의 앨범차트에서 1위를 석권하며 새로운 신기록을 달성'''했다. 발매 첫 주에 [[미국]]에서 200만 장 이상이 팔렸고[* 이 또한 신기록이다.], [[영국]]에서 처음 5일간 50만 장을 팔았다. 빌보드 200 1위를 6주간 유지했고, '''총 38주간 빌보드 200 top 5를 유지하여 남성 솔로 아티스트 사상 최장기록'''을 세웠다. 총 9곡이 싱글컷 되었으며 그중 '''5개의 곡이 빌보드 hot 100 1위를 차지하며 가장 많은 1위 곡을 배출한 앨범'''이 되었다. 또한 총 6개의 곡이 빌보드 싱글차트 top 10을 기록하여 두 번째로 많은 곡을 top 10에 진입시킨 앨범이기도 하다. 첫 번째로 많은 top 10 진입 기록은 마이클 잭슨 자신이 스릴러 앨범으로 수립한 7곡 top 10 진입이다. 자신의 기록을 깬 것이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싱글 프로모션'''은 시다 가렛과의 듀엣 곡인 "I Just Can't Stop Loving You"가 빌보드 hot 100 1위를 기록하며 시작되었다. 이후 앨범의 타이틀 곡 "Bad"가 2주 동안 싱글차트의 정상에 올랐고, 유럽의 여러 국가의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세 번째 싱글 "[[The Way You Make Me Feel]]" 또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했고, "[[Man in the Mirror]]"도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1위를 기록했다. 다섯 번째 싱글 "Dirty Diana"까지 1위를 석권하였으며, 이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했다. 이후 "Another Part of Me"가 11위를 기록,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로 여겨지는 "[[Smooth Criminal]]"이 7위를 기록한다. "Leave Me Alone"은 미국에서 발매되지 않았지만, 다른 5개국 싱글차트에서 top 10에 도달했고, 앨범의 마지막 싱글 "Liberian Girl"은 아일랜드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다른 여러 나라에서 차트의 상위권에 머물렀다. '''[[영국]]의 싱글차트에서 신기록'''을 세웠는데 '''7곡이 top 10을 기록'''한 것이다. 1991년까지 2,500만 장이 팔리며 [[Thriller]]의 뒤를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었고, 1988년과 1989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3,500만 장 이상이 팔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이다. 그러나 잭슨은 자신의 목표치인 1억 장의 판매량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했다고 한다. [[Bad]]는 많은 평론가, 매체로부터 우수한 평을 받았다. [[뉴욕 타임스]]는 "잘 만들어진, 수수께끼 팝스타에 의한 매력적인 댄스 레코드"라고 평했고, All Music의 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잭슨이 확장된 범위의 음악을 하고 있으며 전작과 비슷한 방식으로 음반에 접근했다고 평했다. 또한 '''시대를 초월한 음악''' 중 하나로 묘사했다. 데이비드 베넘은 "'''[[대중음악]]을 영원히 바꿔놓은 작품'''"이라는 찬사를 내렸다. [[Bad]]는 잭슨이 발매한 앨범 중 가장 매끄러운 작품이며 새로운 사운드, 스토리, 공간으로 청취자를 안내한다. 전작의 기대에 힘입어 발매된 잭슨의 새로운 [[블록버스터(영화)|블록버스터]] 출시는 가장 폭발적인 상업적 성공을 가져왔다. 이는 가장 위험하고 실험적인 업적으로 칭송받는 부분 중 하나이다. '''[[Bad]]는 응집력 있는 앨범일 뿐만 아니라 잭슨의 가장 위대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앨범의 수록곡은 [[록 음악]] 사운드를 통해 그의 성숙함을 증명하고, 각 음악 사이에 통일성이 존재한다. 매혹적인 [[펑크(음악)|펑크(Funk)]]는 욕구를 상징하고, 무거운 기타와 드럼 소리는 세계에 대한 분노와 좌절을 표현한다. 음악의 확장된 범위는 후속작에서 더욱 거대해진다. 이 앨범은 [[대중음악]]의 사운드를 재정의한 것으로 유명하며 여러 음악 매체에서 선정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리스트에 포함된다. [[Bad]]는 Thriller보다 음악적으로 깊고 공격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몇몇 평론가들은 Bad를 Thriller보다 높게 평가했고, 세월의 한계를 느끼지 못할 정도의 최신 사운드에 대한 찬사를 받았으며 이는 80년대 후반 등장한 '''[[대중문화]]의 위대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빌보드 200]]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목록에서 138위를 기록했고, Popblerds 1980년대 가장 위대한 앨범 13위에 선정되었다. 또한 당신이 죽기 전에 들어야 할 앨범 1001가지에 포함되었고, VH1은 MTV 세대 가장 위대한 앨범 43위에 선정했으며, Slant 매거진 선정 1980년대 최고의 앨범 목록에서 48위를 차지했다.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에서 202위를 차지했고, NME 선정 가장 위대한 앨범에서 204위에 랭크되었다. 이때 [[그래미 어워드]]의 차별 논란이 불거졌는데, [[Bad]]가 올해의 앨범, [[Man in the Mirror]]는 올해의 레코드를 포함하여 6개 부문 후보에 지명되었음에도 '''상을 단 한 개도 수상하지 못하는 대이변'''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의 그래미 시청률은 1984년 잭슨이 [[Thriller]]로 시상식을 휩쓸었을 때 이후로,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언론과 [[대중음악|음악계]]의 차별은 [[1990년대]]에 들어서며 더욱 강한 기류를 타기 시작한다.''' 한편, 마이클 잭슨은 드디어 '''월드 투어의 개막'''을 알리는데 이것이 잭슨의 첫 번째 월드 투어 "[[Bad]] World Tour"이다. 16개월간 진행된 이 투어는 총 15개국 '''4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123번의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는 1980년대 진행된 투어 중 두 번째로 높은 수익을 거두었으며 단독 아티스트로서는 최고기록이었다. 1987년 6월 29일, 잭슨의 매니저 프랭크 디리오가 그의 첫 번째 단독 월드 콘서트 투어를 시작하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펩시]]의 후원하에 [[일본]]에서 시작되었으며 600명이 넘는 기자, 카메라맨, 팬들은 잭슨의 일본 도착을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기다렸다. 잭슨의 투어 수행원 132명과 함께 22대의 트럭을 실어 나르는 전세 점보 제트기가 사용되었다. 무대 세트는 700개의 조명, 100개의 스피커, 40개의 레이저, 3개의 거울, 2개의 24x18피트 스크린을 사용했다. 공연자들은 70벌의 의상을 입었는데, 그 중 4벌은 광섬유 조명이 붙어 있었다. '''일본에서의 첫 14일간의 관객수는 45만 명으로 최고기록을 갱신했다.''' 잭슨은 1988년 5월 23일 플라미니오 경기장에서 그의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 경찰과 보안 요원들은 35,000명의 군중 속에 깔려 있는 수백 명의 팬들을 구조했다. 경찰은 6월 2일 [[빈(오스트리아)|빈]]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130명의 여성이 실신했다고 보고했다. 6월 17일 잭슨은 코믹 배우 [[찰리 채플린]]의 미망인 오오나 오닐을 만나기 위해 베베이로 여행을 떠났다. 잭슨은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었다"고 방문 후 말했다.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콘서트 중 하나는 1988년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진행되었다. 이때 '''티켓 수요가 150만 회를 넘어섰는데, 이는 72,000명의 만석을 20번 채울 수 있는 규모였다.''' 결국 '''7번의 콘서트로 504,000명의 관객을 수용'''하였으며 이는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이후 관계자들로부터 특별상을 수상했다. 잭슨은 총 3번의 월드 투어를 진행했는데[* Bad 7번, Dangerous 5번, HIStory 3번] 그중 15번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했으며 '''11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했다. 이는 그 어떤 아티스트보다도 압도적인 수치로 '''[[웸블리 스타디움]] 역사상 가장 많은 티켓을 판매한 아티스트'''이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았다. 당시 유럽을 포함한 투어 일정에 포함된 여러 나라의 관객과 팬들은 단지 '''마이클 잭슨을 만난다는 사실에 흥분'''하였으며 '''수많은 인파와 기자, [[파파라치]]들로 인해 마이클 잭슨은 정상적인 이동이 불가능'''했다. 9월 11일 [[리버풀]]에서 열린 마지막 유럽 콘서트는 아인트리 레이스 코스에서 열렸다. 약 1,550명의 팬들이 125,000명 이상의 관중들 사이에서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되었다. 이는 '''역사상 가장 규모있는 콘서트'''이기도 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68.media.tumblr.com/tumblr_inline_oj0eg7DKyR1u7htd6_500.gif|width=100%]]}}} || >'''잭슨은 너무 독특해지려다 다소 기괴하게 됐지만 잭슨에 대한 기업들의 사랑은 계속된다. 잭슨은 늙지도 젊지도 흑인도 백인도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 잭슨은 완벽한 마케팅 로고가 되기 위해 완벽함을 추구한다.''' >---- >― Los Angeles Times 당시 [[마이클 잭슨]]은 분명히 '''그 누구도 도달한 적 없는 위대한 업적을 세웠고, 가장 인기있는 음악가'''였음에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루머]]로 인해 그 위대함을 인정받지 못했다.''' 1988년 LA 타임스는 괴짜 이미지가 잭슨의 재능을 가려버릴 위험에 처해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논란이 많았지만 인기도 많아 영국 갤럽에서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영국 왕실을 제치고 [[영국]]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 시기 잭슨은 괴짜라는 이미지를 가지기도 했고 극성 안티팬들도 꽤 있었지만, 그 어떤 음악가도 넘볼 수 없는 폭발적인 음악성과 대중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캐서린 잭슨은 당시의 마이클을 회고한 부분에서 그가 어느 마을을 갔다고 하면 그 마을 언론사는 하루 종일 잭슨을 취재하기 위해 극성이었다고 한다. 물론 일반인들도 그의 얼굴이라도 좀 보려고 엄청나게 몰렸다고 한다. 1980년대를 마무리 하며 1990년 마이클은 41%의 로열티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음악가들의 평균 로열티인 12%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hH0YoN.jpg|width=100%]]}}} ||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대통령]]은 마이클 잭슨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세기의 아티스트 상"을 수여하였다. [[마이클 잭슨]]은 음악인이 누릴 수 있는 온갖 영예란 영예는 다 누렸으며 세계 각국의 대통령들과 정상들은 마이클 잭슨과 만나길 바랐다. 그는 피부색을 초월한 최초의 슈퍼스타였기 때문이다.''' [[Bad]]를 이름으로 한 모든 캠페인이 마무리 되고 마이클은 더이상 [[퀸시 존스]]와 함께 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마이클이 퀸시와 더이상 일하기를 원하지 않은 이유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편견 때문이었는데, 앞에서 인용문으로 쓴 1987년 SPIN 매거진의 보도에는 사람들은 마이클이 몇 곡을 작곡했지만 뛰어난 작곡가는 아니라며 무시해 버리고 모든 성공을 퀸시의 공으로 돌려버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을 의식해서 인지 Bad 앨범 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퀸시 존스의 사단인 A팀과는 작업하지 않고 자신의 B팀과 1985년 하반기에서 1986년까지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Dirty Diana", "[[Smooth Criminal]]" 등을 독자적으로 만들었으며, 사운드에서도 퀸시와 의견 차이가 있었고 Larry Williams도 확실한 마찰이 있었다고 동의했으며 Michael Boddicker도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었다고 말했다. 퀸시는 한편 마이클을 [[힙합 음악|힙합]]-[[Rap|랩]] 열풍에 맞춰 음악을 그렇게 움직이기 위해 힙합 그룹 [[Run-D.M.C.]]와 미팅을 열고 Bad 앨범에다 힙합 트랙 Crack Kills[* 사비에서 'Demerol' 부분이 Morphine과 흡사하다.]를 넣으려고 했는데 모종의 이유로 결렬됐다. 퀸시는 2010년 가디언과 인터뷰하길 마이클은 퀸시는 사업을 몰라, 랩은 죽었어라고 말했다고, 또 Smooth Criminal 곡을 앨범에 포함시키길 퀸시가 싫어하여 불만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이클이 퀸시를 싫어했던 건 아니다. 그는 많은 시상식들에서 퀸시에 대한 경의를 표했으며 퀸시의 딸과 화보 촬영도 했었다. 하지만 잭슨이 원했던 것은 완전한 제작의 자유 그리고 성공이 퀸시 한 사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퀸시와 마이클의 결별에 대해 루머가 퍼졌는데, 마이클이 돈이 없으니 퀸시를 짜르자고 한 걸 우연히 퀸시가 듣고 불같이 화를 내며 마이클은 퀸시에게 다시 작업해달라고 용서를 빌었다는 스토리로 출처는 1990년 [[동아일보]]의 유명 팝 칼럼니스트가 쓴 이야기인데 당시까지만 해도 컴퓨터가 없어 팝 음악 정보는 오로지 잡지나 팝 칼럼니스트들에 의지해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폐쇄적인 국내의 배경 때문인지 진실로 받아들여져 우리나라의 팝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책들에는 저 설명이 대부분 들어가 있다. 어느 해외 기사에서 나온 소스인 지 알아보기 위해 추적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고 퀸시와 마이클의 결별을 설명하는 해외 매체 그 어디에도 저런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하는 대표적인 마이클의 루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